1. 지중해 세계의 자연적·역사적 성격 (2)

이 역사적 세계는 에게 해를 끼고 지중해 동부의 한 구석에서 오리엔트 선진 문명의 강력한 영향 아래 성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오리엔트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사회(시민공동체)가 분리되어 막 안정된 기반을 다지고 있을 때, 그 세계는 철기시대(기원전 1000년 초)의 전개를 배경으로 거대한 소용돌이처럼  오리엔트 전역을 통합해 가던 팽창주의 공고화 물결(아시리아 제국의 발흥에서 페르시아 제국의 형성에 이르는 과정)에 휩쓸려 가려 했다. 

남부 발칸 반도에 본거지를 둔 작은 그리스 세계가 다윗과 골리앗을 연상시키는 동양의 거인 페르시아와의 전투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여러모로 행운이었다. 그 위기를 극복하는 것은 그리스 세계의 독특한 정치적, 사회적 제도와 문화가 성숙했던 고전기의 시작을 의미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여전히 존재하는 오리엔트의 위협에 대한 대응으로 등장한 헤게모니와 전통적이고 고유한 분리주의 사이의 갈등에서 활력을 소모하는 내전의 시작이기도 했다.


the 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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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모전(특히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지친 그리스인들을 접수한 뒤, 그때까지 야만인으로 여겨졌던 발칸 반도 북부의 마케도니아가 이들을 구적 페르시아에 대한 응징이라는 이라는 슬로건으로 동방 원정으로 이끈 것다. 마케도니아의 젊고 활기찬 알렉산드로스(=>알렉산더)가 노쇠한 페르시아를 물리쳤다는 것은 마치 오리엔트와 동지중해 세계를 아우르는 대제국 건설이라는 역사적 과제를 동방에서 이어받은 것과 같은 상징적 의미를 가졌다.

그러나 실제로 알렉산더가 실현한 것은 제국을 건설이라기 보다 광활한 지역을 포괄하는 군사 원정에 가깝다. 더욱이 그가 정복을 조직하기 전에 죽었을 때 제국은 빠르게 지방 세력으로 분해되어 갈등과 재조정으로 특징지어지는 유례없이 복잡한 국제 관계를 형성했다. 한편 발칸 반도 북부의 안티고노스 왕조의 마케도니아를 위시하여 셀레우코스의 시리아, 프톨레마이오스의 이집트, 소아시아 북부의 페르가몬 등 전통적인 권력 중심지에 위치한 영토 왕국들도 강국이었고, 그들은 그런대로 국제 질서의 균형과 기본 구도를 유지했다.

이러한 변화가 동지중해 세계와 오리엔트 세계에서 진행되는 동안 지중해 반대편에서는 두 세력이 지역의 패자를 결정하기 위한 중요한 권력 투쟁을 벌였다. 서지중해의 바다를 장악한 북아프리카 해양국가 카르타고('신도시'를 의미하는 페니키아어의 라틴어 음역)와 이탈리아 반도를 정복하고 바다로 나아가려던 육상국가 로마의 대결인 포에니 전쟁이 바로 그것이었다.

어찌 보면 이 전쟁은 그리스 세계와 동양 세계의 대결의 연장선이라는 흥미로운 측면이 있었다. 카르타고가 기원전 8세기와 6세기에 해양 무역과 알파벳 발명으로 유명한 페니키아인(따라서 로마인들은 카르타고를 포에니 또는 페니키아인이라고 불렀음)에 의해 서부 지중해 지역의 식민지의 지도자였다면, 로마는 말하자면 그리스 문화와 제도의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으며 성장한 도시로 그리스의 색채가 강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대결(특히 3세기 말 한니발 전쟁)의 승리로 인해 로마는 갑자기 지중해에서 강대국으로 부상했고 동시에 거의 불가피하게 지중해 동부의 헬레니즘 세계 열강들과의 일련의 긴장과 갈등 관계에 들어서게 된 것이었다.
 
기원전 146년은 로마가 지중해 제국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분수령이었다. 카르타고를 파괴하고 그 영토를 새로운 속주로 편입함으로써 로마는 서부 지중해에서 승리를 거두려 했으며, 동시에 발칸 반도에서는 마케도니아를 속주화하고 코린트 시를 파괴했다. 특히 코린트 시의 파괴와 그에 따른 일련의 행동은 분명히 그리스 도시들의 자유를 박탈하는 것이어서, 반세기 전에 로마가 동지중해 세계의 문제에 개입하기 시작했을 때 취했던 태도ㅡ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에서 승리 직후 그리스 도시들의 자유를 선언한 196년 이스모스 선언문ㅡ와는 분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그것은 특히 헬레니즘 왕국에 대한 로마 외교 정책의 기본 전략의 변화를 반영했다. 즉, 로마는 정치적·문화적으로 선진 헬레니즘 국가들을 장악했던 방어적 제국주의나 패권주의 정책을 버리고 보다 직접적인 통치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로마의 통치를 직접 수행한다는 것은 그 나라들을 속국으로 만드는 것을 의미했고, 그 과정은 BC 30년 악티움 해전에서 로마가 헬레니즘 세계의 마지막 남은 강국인 이집트를 한 지방으로 편입하면서 끝났다. 따라서 제국이 성립되기 이전에 로마인들은 이미 아프리카 북해안의 동부 일부를 제외하고 지중해의 바닷물이 스치는 거의 모든 지역을 자신들의 영토로 삼았고, 지중해를 '우리의 바다'라고 부를 수 있는 제국으로 성장했던 것이다.
 
따라서 보통 기원전 27년을 차지하는 로마제국의 개념은 제국 형성 그 자체라기보다 황제에 의한 제국 통치 체제의 확립에서 비롯되었다. 물론 제국시대에 영토가 다소 확장된 것은 사실이다. 적어도 2세기 초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제국을 더 확장하는 대신 방어하는 쪽으로 정책을 바꾸었을 때, 로마 속주의 수는 계속해서 증가했다(아프리카 북동쪽 해안을 따라 제외된 지역이 로마 속주로 편입된 것을 따라 특히 갈리아 북부와 라인 강과 도나우 계곡에 이르는 유럽 내륙 일부, 영국 제도의 일부가 로마 영토에 추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으로 통일된 지중해 세계의 입장에서 제국의 초기 200년은 정복이 아닌 평화의 시대, 즉 '팍스 로마나(로마의 평화)'의 시대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평화의 중요한 열매는 지중해의 경제적 번영이었다. 해적과 전쟁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한 지중해 운송과 결합된 농업 및 제조업 분야의 안정적인 생산 활동은 눈부신 경제 확장과 도시 건설을 자극했다. 로마 평화 시대에 절정에 달한 고대 문명은 이러한 물질적 조건을 기반으로 구축되었으며, 지중해 무역과 이로 인해 생겨난 도시의 소멸을 그 징표로 삼은 벨기에 역사가 앙리 피렌느(Henri Pirenne)의 시각은 상당히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다. =>지중해 무역의 소멸, 그 무역으로 번영한 도시의 소멸 = 고대 세계의 종말
 

 

 
『서양사강의』, 배영수 엮음, 한울 아카데미,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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