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컨대 미케네 시대 왕국들의 모습은 관료제와 상비군에 의해 지탱되었던 오리엔트의 공납제 전제 왕국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특히 기르수(Girsu)나 마리(Mari) 같은 초기 청동기시대 메소포타미아의 몇몇 중심지들에거 출토된 점토 서판 왕실 문서들이 미케네의 서판들과 거의 유사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은 두 문명에서 사회를 조직하고 통제하는 방식이 비슷했음을 보여주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증거이다. 다만 왕권의 강도와 왕국의 규모에 차이가 있었다고 할 터인데, 우선 촌락공동체들의 노동력을 대규모로 조직할 관개 농경의 유인이 없었고, 또 지리적 통일성도 결여되어 있던 발칸 반도에서는 오리엔트보다는 비교적 상대적으로 미약한 소왕국들이 분립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고고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기원전 1200년경 왕궁들과 주거지들을 화재와 파괴로 폐허화시킨 동란에 의해 이 미케네의 왕국들은 종식되었다. 사실 이 동란은 거의 같은 시기에 이집트, 소아시아, 메소포타미아의 청동기 문명들에도 큰 변화를 초래한 동지중해 일대의 대격동의 일환이었으며, 그 격동은 아직도 그 정체를 뚜렷이 알 수 없는 이른바 '바다 사람들'의 대이동에 기인한다고 추측되고 있다. 하지만 미케네 문명의 파괴에는 그 무렵 두 번째로 발칸 반도를 남하하기 시작한 그리스인들ㅡ특히 도리아계 방언을 사용한 그리스인들ㅡ에게도 상당한 책임이 있었다는 주장이 꽤 유력시되고 있다. 아무튼 붕괴의 원인이 무엇이었든지 붕괴의 결과는 매우 분명했으니, 그것은 문명과 사회조직의 소멸이요 이주와 전쟁의 생활화였다(소아시아 서안으로의 이주는 이때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 결과 前述한 그 피라미드 구조에서, 지배 조직의 붕괴로 상부는 온통 날아가버리고, 촌락민의 이주 혹은 전쟁으로 저변이 불연속의 점선으로 변해버린 모습을 상상해 보라. 그런 상태에서 문자가 쓰이거나 필요했을 리 없으므로, 이 시대는 문자 기록의 조명을 받지 못하는 이른바 암흑시대인 것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그 시대의 사회로 우리를 조심스럽게 인도해 가는 작은 등불이 있다. 암흑시대를 벗어날 무렵, 대략 8세기 후반에 형성되기 시작한 호메로의 서사시, 특히 『오디세이아(Odysseia)』가 바로 그것으로, 거기에는 암흑기 후반(기원전 10~9세기)의 사회상이 반영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사실 『오디세이아』에 묘사된 이타카(Ithaca)는 분명 혼란스러웠을 암흑기 초의 사회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아직도 국지적 전쟁과 개별적 폭력의 위험이 상존하고 있으나, 그래도 이타카는 주민이 농경 및 가축 사육과 같은 평화적 생업을 영위하고 있는 안정된 사회로 등장한다. 그리고 그런 가운데 계서적 조직도 어느정도 되살아나 있다. 주지하듯이 오디세우스는 이타카의 군주(basileus)이지만, 그밖에도 역시 '바실레우스'로 불리는 일군의 장로들이 군주의 자문 역을 맡고 있었다. 이로부터 우리는 두 가지를 연역해 낼 수 있다. 첫째, 미케네 시대에 '바실레우스'가 촌장을 가리키는 명칭이었음에 비추어, 이타카의 장로들이 모두 같은 명칭으로 불리고 있다는 사실은 군주권이 상대적으로 미약했음을 시사한다. 오디세우스는 말하자면 그저 '동등자들 가운데의 제1인자'일 뿐이었다. 그래서 그의 지위는 아들 텔레마코스에게 자동적으로 세습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그 동등자들 중 용기와 능력을 가진 자에게 개방되어 있었다.
요컨대 이 사회는 한 개 혹은 몇 개의 촌락에 기반을 둔 바실레우스들이 느슨하게 결합한, 말하자면 맹아적 귀족사회였다. 그처럼 바실레우스들이 서로 국지적으로 결합해 있거나 혹은 개별적으로 우의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들이 보통의 촌락민들보다 우월한 지위를 누릴 수 있었던 중요한 배경이었다. 원정은 그들의 공동 활동의 주된 형태였으며, 그들이 서로 자랑하고 또 우의의 표시로 주고받던 창고의 보물들은 그 원정의 전리품들이었다. 또 한 가지 그들의 우위의 원천은 상대적으로 규모가 큰 그들의 가계(oikos)였다. 그들의 집안에는 직계존비속 외에 노예 혹은 시종과 같은 비혈연자들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한편 가축의 수와 창고의 보물들은 그들 사이에 가세를 가늠하는 중요한 기준이었다. 주로 과수원과 경작지로 된 토지가 있지만, 그들은 그거을 재산으로서 별로 중시하지 않았던 것 같다. 보다 중요한 점은 그들의 토지가 '별도로 할당된 땅'으로 불리곤 하는 점으로 보아, 아마도 그것이 어느 때인가 촌락공동체 업무의 대행을 조건으로 공유지에서 떼어 받은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촌락민 일가의 '할당지'만큼이 사적 소유의 성격이 강한 것으로 전환되어 있었다고 생각된다. 암흑기 말의 그리스 사회는 서양의 고전고대 사회를 특징 짓는 토지제도ㅡ즉 토지의 공동체적 소유와 사적 소유의 결합ㅡ의 단서를 어느정도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다.
『서양사강의』, 배영수 엮음, 한울 아카데미,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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