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그리스 세계 : 폴리스들의 성쇠

 

1) 폴리스 출현 이전의 그리스 사회 : 미케네 시대(기원전 1600~1200)와 암흑시대(기원전 1100~800)

 
에게해 문명의 발견은 19세기 말 이후 고고학의 가장 눈부신 업적 중 하나로 손꼽힐 만하다. 풍부한 고고학적 개척사를 남긴 일련의 극적인 발굴과 해독의 결과 에게해 주변의 발칸 반도, 크레타 섬, 키클라데스 제도는 이웃한 오리엔트 선진 문명과 거의 같은 시기의, 비슷한 높은 수준의 청동기 시대 문화의 증거를 발견했다. 그리고 증거 해석에서 얻은 몇 가지 주요 결론은 다음과 같이 대략적으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신석기시대 이후 인구이동이 빈번했던 선진 근동과의 꾸준한 교류의 결과 초기 청동기시대(기원전 2800~1900년)의 에게문명은 인종적, 문화적 구성 면에서 아시아적 특성이 매우 강하게 나타났다.
둘째, 그러나 B.C. 2000년경에 발칸반도 북부에 도달한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일부 이주민 집단이 중기 청동기시대에 파상적으로 남하하여, 후기 청동기시대에는 반도의 중부와 남부, 그리고 그 사이에 에게해(즉, 미노아 문명)에서 가장 발달한 크레타의 토착민들을 제압하게 되었다.

통칭 미케네 문명이라고 불리는 이 마지막 청동기 시대의 주인공들에게서 이야기를 풀어 나가야 한다. 문명의 일부 유적지에서 출토된 점토판의 선의 B 문자가 해독되면서 처음으로 사용한 주민임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다행스럽게도 석판의 기록을 통해 웬만큼 그들의 사회적 성격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시대의 사회를 논하기에 앞서 다른 고고학적 자료를 통해서도 확인되는 한 가지 사실. 즉, 이 후기 청동기 시대 문명은 펠로폰네소스 동남쪽에 있는 미케네라는 성채의 이름을 취했지만, 전체 문명이 미케네에 의해 정치적으로 통일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요새를 중심으로 다수의 작은 왕국들이 미케네처럼 분리되어 있는 세계였다.

새로운 침략자들이 도입한 특정 개성에도 불구하고 미케네 문명의 유물은 이전의 청동기 시대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강한 동양의 영향을 반영했다. 오리엔트 문명의 세례를 받은 흔적은 점토판의 기록에서 드러나는 미케네 시대의 정치·사회 구조에서도 드러난다. 사실 석판 자체는 출토된 왕궁터의 왕궁창고에 보관된 공물(예를 들어 크노소스와 필로스가 대표적인 유적임), 장인들에게 구리를 분배하거나 여러 왕실 신하들(봉사자들)에 대한 식량이나 토지에 대한 식량, 기타 무기의 재고, 군대의 배치 정도만 기록했기 때문에 일종의 단순한 왕실 출납 장부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거기에 남아 있는 몇 가지 중요한 단어의 기본적인 의미와 맥락적 기능을 바탕으로 막연하지만 그 시대의 사회상을 그려볼 수 있다.
 
그건 피라미드 구조의 사회였다. 그리고 그 기반을 이루고 있는 것은 농업과 목축업에 종사하는 인민들의 촌락들이다. 서판에는 종종 마을 또는 전체 마을을 가리키는 듯한 표현으로 damo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나중에 '인민'을 의미하는 고전 그리스어 데모스(demos)의 원형이라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마을 토지의 일부를 그들을 대표하고 공동체 업무를 수행하는 촌장에게 할당한 것으로 보인다. 촌장을 뜻하는 pasireu라는 단어는 나중에 왕을 의미하게 된 바실레우스(basileus)라는 단어의 기원으로 여겨진다. 한편, 서판에서 와나카라고 불리는 피라미드의 정점에는 왕국 전체의 통치자이자 궁전의 주인인 왕이 자리하고 있다.
청동기시대의 주요 전략물자였던 구리는 물론 마을에서 궁궐로 들어온 가축과 은그릇 등 조공품을 통해 그가 왕국을 지배했다는 분명한 증거를 찾을 수 있다. 그리고 공물 제도를 유지하기 위해 왕은 신생 관료제라고 부를 수 있는 것에 의존하고 있다. 즉, 중앙정부가 임명한 관료를 파견하거나 촌장 등 지방 유력자를 고용하여 마을을 통제하는 것이다. 아마도 군 사령관으로 추정되는 Lawagetas도 관료기구의 중요한 구성원이었다. 관리들은 일반적으로 공유되는 것처럼 보이는 토지를 할당받았지만 공유지의 실제 성격은 불분명했다. 이러한 토지공유제도의 한쪽에는 토지를 사유화한 흔적이 남아있다는 주장도 나왔다.

또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왕궁에 속한 다양한 신하들 중 노예가 압도적 다수를 차지했다는 사실이다. 흥미롭게도 그들 대부분은 외국에서 온 여성이었고 주로 직조, 가사, 종교 일에 종사했다. 남자 노예는 청동 제련소 대장장이의 부역자들과 궁궐을 지키는 젊은이들뿐이었다.

이상의 사실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점을 시사한다. 첫째, 노예의 출처는 주로 전쟁에서 산 채로 포로로 잡힌 여성과 소녀들이었으며, 때때로 직조 등의 숙련된 기술을 가진 노예를 외국 상인들로부터 구입하기도 했다. 둘째, 노예는 주로 왕족에 집중되어 있었고, 사적 노예제도는 예외적인 현상이었다. 셋째, 노예의 기능은 대체로 비생산적이었고, 생산적일 때도 노예 사용은 대부분 비농업 부문에 국한되었다. 즉, 이 사회의 지배계급을 지탱하던 농업생산의 주체는 노예가 아니라 마을농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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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Pyramid structure


 
 
 
『서양사강의』, 배영수 엮음, 한울 아카데미,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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