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反) 폭정 운동의 선봉이었던 클라이테네스가 주도한 기원전 6세기 말의 개혁은 두 가지를 목표로 했다. 먼저 민주화의 근본 전제로서 양반의 전통적 권력 기반을 해체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기존의 4부족 제도를 폐지하고 교묘하게 결합·조직한 10부족 제도를 도입하여 지역적 기반을 무너뜨리고, 4부족 제도의 하위 단위인 프라트리아로 부터 데모스(아마도 기존 마을을 기반으로 하는 약 170개의 새로운 행정 구역)로 일부 중요한 기능은 으로 이전되었다.
그리하여 아테네는 폴리스 황금기 동안 귀족들의 지주들과 함께 중앙에 집중되어 있던 정치조직과 권력이 해체되는 과정을 겪었다. 둘째, 이러한 행정개혁을 바탕으로 여러 민주적 제도가 도입되었으나, 그 중 새 국정의 예비심사기관으로서 500인의회를 구성·운영한 것은 거의 제한 없이 모든 국민이 참여의 기회를 보장받았음을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즉, 데모스에 등록된 시민은 누구나 추첨을 통해 평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운이 좋으면 평생 적어도 하루 동안 의회나 의회를 주재할 수 있었다.
그러나 클레이스테네스가 확립한 민주주의 하에서도 적극적인 정치 참여를 제약하는 제도적·실질적 요인은 어느 정도 남아 있었다. 집정관과 같은 고위 행정직의 투표권은 여전히 시민의 상위 2계급에 한정되어 있었고, 하위계급, 특히 4계급 프롤레타리아트인 테테스는 생계의 방해로 시정에 한가하게 관여하지 못했다. 이 참여 민주주의는 보상 없이 시민들의 시간과 노력을 요구했기 때문에, 적극적인 참여는 실질적으로 생계 문제가 없거나 적어도 생계 대리인이나 대체 노동을 할 수 있는 부유한 중산층 시민으로 제한되었다. 요컨대 시민의 여가는 민주주의 제도 운영에 있어 거의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발전하고 있었다.
페르시아 전쟁 직후 그리스 세계 내에서 일어난 국제질서의 재편은 고전적 폴리스가 기원전 5세기 중반 아테네에서 논리적 극단에 도달하는 데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즉 아테네가 페르시아 전쟁을 통해 기른 강력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전후 에게 해에서 해양제국으로 급속히 성장한 과정과 민주주의가 급진적 경향과 노예제가 된 아테네의 내부 변혁 시민 생활의 공통 조건이 되었고, 이 둘은 밀접하게 얽혀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기원전 5세기 아테네는 결코 전형적인 고전적 폴리스가 될 수 없다.
아테네 해군의 성장은 자비로 무장할 수 없었기 때문에 폴리스 방어에서 소외되었던 하층민들까지도 군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그들은 함대에서 노 젓는 사람으로 고용되어 무장이 거의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국이 함대의 기동부대로 남아 있는 한, 선원들의 애국심은 배의 갑판에 배치된 소수의 중장갑 보병보다 훨씬 더 큰 비중을 차지했다. 그 결과 하층민들은 정치화되었고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은 크게 신장 되었다. 귀족정의 잔재를 말살하고, 민회의 기능과 권한을 강화하며, 수적으로 우세하여 상층과 중층의 증오의 대상인 하층민을 설득하거나 선동하여 정치적 성공을 도모하는 개혁, 데마고고이(demagogoi, 상층과 중산층 시민의 혐오 대상이던)라는 새로운 유형의 정치가들의 등장, 이것들은 모두 하층민의 정치화에 따른 민주주의 급진화 산물이었다.
상품 중 공무 수행에 대한 수당제도 도입이 눈에 띈다. 이는 무엇보다 공무와 생계의 양립에 어려움을 겪는 하층민의 정치 참여를 활성화하기 위한 유인책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보다 근본적으로 토지에서는 이룰 수 없었던 것이 폴리스의 공동체적 기능(구성원의 재생산을 위한 공유 재산의 분배)이었다. 이게 금융소득의 영역에서 실현되고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아테네 시민의 지위는 심리적으로 뿐만 아니라 물질적으로도 보상을 받았고, 이에 따라 참여민주주의가 확대되는 추세에 비추어 볼 때 다소 역설적이게도 시민의 자격은 보다 폐쇄적으로 정의되고 시민단체의 규모는 축소되었다. 부모가 모두 시민인 사람에게만 시민권을 인정한 페리클레스의 이른바 「시민권법」이 대표적이다. 여하튼 수당제도를 위한 예산이 주로 제국통치에 따른 공적·비공식적 수입에 의존했다는 점, 그런 의미에서 아테네의 급진적 민주주의는 제국주의와 구조적으로 결합되어 있었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페르시아 전쟁은 아테네를 비롯한 대외무역이 상대적으로 활발했던 폴리스에서 노예제도의 확산이 가속화되는 계기이기도 했다. 페르시아의 위협이 사라지고 에게 해와 흑해 주변 지역이 아테네 해군력, 특히 '그리스인이 아닌 거주자'(바르바로이)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사고파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상인들의 손을 거쳐 그리스 세계로 유입되기 시작했다. 제국의 수입이 늘어나 구매력이 높아지면서 점차 동지중해 최대의 무역 중심지로 떠오른 아테네가 이들 상품 노예들의 강력한 고객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따라서 매우 보수적인 추정에 따르면 이 노예들은 5세기 후반에 아테네 인구의 3분의 1에 이르렀다.
노예는 정치, 군대 등 시민 고유의 활동 영역을 제외한 거의 모든 삶의 영역에 배치되었다. 특히 은광으로 유명한 라우리온은 전성기에 수만 명의 노예를 투입했고 소유했던 수공예 작업장의 예가있었다.
한편, 상업 및 금융 부문에서는 노예가 주인으로부터 상당한 독립을 허용하고 결국 강력한 관리자로 성장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반면에 농업에서 노예의 역할은?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솔론의 개혁 이후 아테네로의 토지 집중이 억제되었기 때문에 로마 시대의 대규모 농장과 같은 대규모 노예 노동 조직은 설 자리가 없다. 최근의 논의는 노예가 시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독립 농장의 노동력의 필수적인 부분이었는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만 긍정적인 답변이 우세한 경향이 있다. 증거가 역사적 자료라기보다 정황론이라는 점이 더 흥미롭다. 정황론에 따르면 3~4인으로 구성된 평균적인 아테네 농가의 가장이 민주시민으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노예 1~2명이 보조노동력으로 존재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그렇다면 노예제도는 제국주의 못지않게 아테네 민주주의에서 없어서는 안 될 요소로 보아야 한다.
한편, 제국주의, 노예제, 민주주의의 조건 덕분에 아테네는 갑자기 '그리스의 학교', 즉 그리스의 문화 중심지로서의 지위를 획득하게 되었다. 기원전 5~4세기를 가리켜 그리스의 고전기라 일컫는 이유는 주로 그 시대의 찬란한 문화적 결실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 문화적 성취는 거의 아테네를 무대로 삼고 있었다고 해도 될 정도이다. 그리스 전역에서 건축가, 화가 등 예술가들이 풍부한 물질적 보상과 창작의 기회를 찾아 아테네로 몰려들었고, 그런 점에서 지식인도 예외는 아니었다.
민주주의의 발전과 함께 대화와 토론의 중요성을 인식한 아테네 시민들에게 법의학이나 수사학의 형태로 지식을 팔았던 이른바 소피스트들이 그 대표적인 예다. 어쨌든 이렇게 모인 지식 엘리트들 사이의 생존 경쟁(?), 지적 자극이 문화적 진화에 한 몫을 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역사, 비극, 수사학, 철학, 의학 등 다양한 지식 분야에서 진화의 방향을 규정한 것은 민주주의가 내포한 휴머니즘, 합리주의 등의 요소였다. 즉, 민주적 사회생활은 역사의 주체가 신이나 준신적 영웅이 아닌 평범한 인간임을 깨닫게 했을 뿐만 아니라, 그 사이의 문제를 논리적으로 파고들어 논쟁하는 것이 더 중요함을 일깨워주었다. 인간은 그들을 숨기고 신비화하는 것보다. 즉, 조용한 신화의 시대가 끝나고 시끄러운 합리성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신화를 소재로 한 비극시의 장르가 쇠퇴하고 역사, 인간철학, 수사학이 대두된 것은 이러한 변화에 상응하는 현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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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강의』, 배영수 엮음, 한울 아카데미,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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