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헬레니즘 세계 : 영토 왕국들의 성쇠
19세기 초에 처음 만들어진 Hellenismus라는 용어는 원래 르네상스와 계몽주의와 같은 개념과 같은 독특한 문화사적 경향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그러나 최근까지도 그 쓰임새가 더욱 확대되어 정치사적 관점에서 시간을 구분하는 단위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즉,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기원전 323년부터 옥타비아누스가 악티움 해전에서 승리한 기원전 30년까지의 기간을 흔히 헬레니즘 시대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러한 헬레니즘 개념의 사용에는 그 타당성을 의심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무엇보다 문화적 현상으로서의 헬레니즘이 적어도 서기 3~4세기까지는 지속된다는 사실과 상충된다. 더욱이 기원전 323-30년의 정치적 역사적 특징과 헬레니즘 문화 사이에는 깊은 상관관계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를 '헬레니즘 시대'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저항이 부족한 것은 주로 다음과 같은 사실에 기인한다. 우선 시대의 과도기적 정치사에서 적절한 대안적 개념을 추출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역사가들은 그 시대의 정치적 중요성을 그리스 역사의 연장선이자 궁극적으로 로마가 건설하고 있던 지중해 제국으로 수렴되는 예비 단계로만 본다.
따라서 정체성이 약한 이 정치사의 시대는 필연적으로 동시에 형성되고 확산되기 시작한 문화적 현상에서 그 이름을 차용했지만 과도기적 현상이라고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다. 그 결과 '헬레니즘 시대'는 2차원에서 서로 다른 시간을 가리키게 되었다. 하나는 약 300년의 정치사의 단위이고, 다른 하나는 더 긴 기간(6~7세기 이상) 동안 지속된 문화사의 단위이다. 물론 헬레니즘 세계에 대한 이야기는 두 가지 측면을 모두 포함해야 한다.
1) 헬레니즘 세계의 정치
비록 헬레니즘 시대가 전체 고대 세계의 정세 변화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전후 시대에 비해 적었지만, 그 시대의 정치적 발전은 나름의 양상이나 특징이 없었다. 그리스와 로마의 역사를 각각 폴리스와 지중해 제국의 흥망성쇠의 리듬으로 이해한다면 헬레니즘 세계는 영토왕국의 흥망성쇠 과정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이 다소 과감한 단순화의 큰 매력은 고대 지중해 세계사의 발전을 '도시국가→영토국가→제국'의 단계적 이행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현실은 항상 훨씬 더 복잡하고 특히 헬레니즘 시대의 정치사는 파악하기 어려운 것으로 악명이 높다.
이미 언급했듯이 헬레니즘 세계는 여러 면에서 알렉산더 대왕이 남긴 유산 위에 세워졌다. 그 성공이 워낙 경이적이어서인지 역사보다는 낭만에 가까운 기록만 남긴 그의 동방 원정은 헬레니즘 세계의 정치지도 형성에 가장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물론 알렉산드로스 사후 얼마 지나지 않아 지도가 급격히 축소되기 시작했지만 그 자신도 이에 대한 부분적인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기원전 330년 원정의 주 목표였던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3세가 물러난 이후에도 그는 거의 맹목적으로 원정에 몰두한 채 대대적인 정복을 효과적으로 조직하는 데 소홀했다.
그가 유럽-아시아 제국을 운영하기 위한 준비로 추정되는 몇 가지 조치를 취한 것은 기원전 324년에 인도 원정을 포기하고 수사로 돌아온 후에야 가능했다. 예를 들어, 그는 자신을 포함하여 10,000명의 마케도니아 장교 및 군인과 페르시아 여성의 집단 결혼을 주선했으며 마케도니아 스타일로 훈련된 아시아 청년들의 병력을 양성한 것 등.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BC 323년 그의 요절과 함께 무산되었다. 이러한 사실들이 헬레니즘 세계의 미래에 영향을 미쳤던 만큼 알렉산더는 죽는 순간에도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았다.
그래서 알렉산드로스 사후 그 휘하의 장군들은 서로의 후계자라고 주장하며 치열하게 싸웠다. 후계자의 대의를 강화하기 위해 알렉산드로스의 과부, 부자, 심지어 그의 몸까지 은밀히 서로의 손을 차지하기 위한 투쟁을 벌였고, 세력권을 유지·점령·확대하기 위한 무장투쟁도 계속됐다. 그 중 프톨레마이오스만큼 순조로운 사람은 이집트에서 초기에 왕조의 기반을 세우고 자신의 관할하에 있는 가신이었고 이집트 외부의 해군력과 영토를 획득할 수 있는 기회를 이용했다. 그들 대부분은 도박꾼처럼 극한의 모험과 좌절, 부귀를 겪어야 했고 안티고노스 가문의 역사가 그 대표적인 예였다.
소아시아의 총독 안티고노스는 기원전 310년대에 아시아의 다른 총독들을 압도하며 세력 확장에 성공했고, 그 무렵 발칸 반도에 진출한 그의 아들 데메트리오스도 고대 그리스 세계를 장악한 뒤 북쪽에 있는 마케도니아를 삼킬 기세였다. 알렉산드로스 제국에 대한 공동 주권에 대한 그들의 주장은 곧 현실이 될 것 같았다. 그러나 다른 장군들의 연합 전선이 빠르게 형성되었고 아버지와 아들은 기원전 301년 입소스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했다.
아버지는 죽고 겨우 전쟁터를 탈출한 아들의 손에는 흩어진 몇 개의 도시만이 남았다. 안티고노스의 아시아 영토는 연합 전선에 있던 Seleuchos와 Lysimachos로 나뉘 었다(전자는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를, 후자는 소아시아를 점령했다).
그러나 안티고노스 가문의 운명은 끝나지 않았다. 천성적으로 모험심이 강하고 기민한 데메트리우스는 마케도니아 주권의 분열을 이용하여 왕좌를 찬탈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다시 확장을 시도했고 다른 장군들이 다시 한 번 공동전선을 열어야 할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그는 통일전선 앞에 다시 무릎을 꿇고 아시아의 피난처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러나 Lady Luck은 그의 아들 Antigonus에게 가문의 위신을 회복할 기회를 주었다. Antigonus는 Lysimachus를 견제하려는 Seleucus의 도움으로 발칸 반도에 기지를 세웠고 마침내 BC 276년에 마케도니아를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100년 후 로마에 의해 멸망될 때까지 마케도니아 왕국을 통치했던 안티고노스 왕조는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세워졌다.
Antigonus 가족의 경우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극도로 혼란스러운 상황은 Alexander가 죽은 후 약 한 세대 동안 지속되었다.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왕위 찬탈을 위한 은밀한 투쟁이 그러한 혼란의 주요 원인이었다면, 왕위 계승의 가장 유력한 유망주였던 안티고노스를 좌절시킨 입소스 전투는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일부 장군들은 왕(바실레우스)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이제 그들이 알렉산더의 제국보다 그들의 영토에 대한 권리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전환이 결정적으로 일어난 것은 알렉산드로스의 생존한 주요 장군들이 모두 세상을 떠났을 때(B.C. 283-280)였다. 제국의 무상이라는 가망 없는 목표를 추구했던 '상속자'의 세대가 끝나면서 상속의 명분이 약한 '후손'은 자연스럽게 보다 현실적인 목표로 눈을 돌렸다. 즉, 제국 분단의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각자의 영역 내에서 왕조 통치의 기반을 강화하는 데 더욱 주력하였다. 그 결과 헬레니즘 세계의 상황은 자연스럽게 바뀌었다. 전쟁은 끝나지 않았지만 영토의 경계와 주인이 예전처럼 급격하게 바뀌는 일은 거의 없었다.
특히 안티고노스 왕조 아래의 마케도니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아래의 이집트, 셀레우코스 왕조 아래의 시리아라는 3대 강국은 적어도 로마가 출현하기 전까지는 변함없이 헬레니즘 세계의 상황을 주도할 것이다.
『서양사강의』, 배영수 엮음, 한울 아카데미,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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