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헬레니즘 시대의 사회·경제·문화

헬레니즘 시대의 사회와 경제를 요약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고 무리한 일이다.
알려진 사실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지만 각 왕국의 측면이 복잡하고 다양하기 때문이다.

발칸반도의 경우를 제외하고 헬레니즘 왕국의 사회구조는 다음과 같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도시와 시골, 그리스-마케도니아인과 아시아 원주민, 부자와 가난한 자, 착취당하는 자의 구분은 대체로 동일하다.
이것은 아시아의 헬레니즘 왕국이 그리스-마케도니아 정복의 산물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정복자들은 거의 예외 없이 그리스의 전통적인 생활 방식을 따라 도시에 정착했다. 아시아에는 기존 도시가 부족했기 때문에 초기 헬레니즘 장군(이후 왕)은 군인과 민간인을 위해 많은 도시를 건설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리스 본토에서 자발적인 이민자, 상인 및 용병에 의해 정착지가 자연적으로 도시화되는 것도 드문 일은 아니었다.

hellenism_language
common language

 

그리스 정착민들의 다양한 기원과 배경은 이질적인 환경에서 소수 집단으로서의 연대감으로 쉽게 해소되었다. (식민지 도시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현상)

알 수 없는 다양한 토착어의 세계에서 적어도 '코이네'를 통한 소통은 도시민들이 일체감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 통일된 언어의 중요성

도시는 또한 매우 제한적으로 토착민(주로 귀족과 일부 중산층)이 그리스 세계에 동화되는 공간, 즉 헬레니즘화를 위한 공간이기도 했다. 대부분의 경우 알렉산더의 결혼 정책에 포함된 원대한 비전과는 거리가 먼 각 왕국이 직면한 실제 필요 때문이었다. 즉, 주민들을 직접 상대하는 하급 관리직에는 현지 환경과 언어를 아는 원주민을 고용하는 것이 불가피했다. 물론 일반 그리스어의 사용은 그들에게 최소한의 요구 사항이었고, 그것은 도시의 커리큘럼을 통해서만 습득되었다.

 

수도든 지방이든 도시는 헬레니즘 왕국의 행정 및 경제 생활의 중심지였다.
도시의 상층부를 점령한 그리스인들은 폐쇄적인 엘리트였다. (왕의 보좌관, 고위 행정직, 육해군 사령관)
안전하게 '부르주아'라고 부를 수 있는 중간 계층은 비생산적인 직업에 종사하는 그리스인과 동화된 원주민으로 구성되었다. (주로 상업, 수공예, 기타 교사, 의사, 과학자, 철학자)

중산층과 상류층 시민의 협력은 왕국의 모든 일을 운영하는 데 매우 중요했다.
그래서 왕은 충성심을 확보하려고 노력 -> 자치권 승인, 지방 자치권 부여, 극장과 사원의 신축, 기근 시 재정 지원 등.

 

반면에 도시 생활의 변두리에 있는 하층 노동자의 구성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다. (기록으로 남길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건 아닐까?)
그러나 노예의 수와 기능은 알 수 없지만 노예가 도시 생활의 미미한 부분을 차지했음을 암시하는 간접적인 증거는 적지 않다.
예를 들어, 전쟁이나 반란이 일어났을 때 시 당국이 발표한 포고문에는 거의 변함없이 '노예 해방'이라는 약속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아마도 노예가 반란에 가담하거나 도망칠 가능성에 대한 예방 조치였을 것이다.

 

농촌은 전적으로 원주민의 세계였으며 그들은 원칙적으로 왕에게 속한 농민이었다.

전통적인 아시아 왕조 이데올로기를 기반으로 헬레니즘 군주도 왕국에서 가장 큰 지주였으며 그들의 농민은 집단 농부, 즉 일반적으로 마을 단위로 땅을 경작했다. 물론 농민의 임차조건은 그들이 경작하는 토지의 법적 지위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즉, 이집트의 경우와 같이 왕이 고위 관리들과 사원들에게 분배한 토지의 임대료는 왕의 직계 가족보다 훨씬 높았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농민의 삶은 과거보다 더 혹독한 착취에 짓눌려 피할 수 없는 빚의 늪에서 신음하는 궁핍한 삶이었다.

농업 생산성은 정적이지 않았지만 빠르게 성장하는 헬레니즘 도시로 몰려든 그리스 인구를 지원하는 데 필요하다고 믿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자 봉기와 구멍은 아시아에서 매우 흔하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자신을 포기한 외부 문명의 착취에 수동적이고 무기력하게 대응하는 법을 배웠다고 믿었을 것이다.

 

오히려 기원전 3세기와 2세기 동안 계급 갈등과 혁명적 상황이 만연했던 곳은 발칸 반도였다. 알렉산더 대왕의 원정 이후 그리스 본토의 상당 부분이 이민자나 용병으로 아시아로 추방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놀라운 일이다.
여하튼 4세기부터 폴리스를 해체하기 시작한 사회적 문제는 아직까지 극복되지 않고 있는 것은 시민들의 '화해'가 왕과 사신, 시 관료들의 단골 슬로건으로 등장하고 '부채 탕감' 또는 '토지 재분배' 같은 낡은 혁명적 슬로건이 만연했다는 사실이 이를 잘 반영한다.
가장 잘 기록된 헬레니즘 시대의 사회혁명(기원전 3세기 말 아기스왕과 클레오메네스의 개혁운동)인 스파르타의 경우, 혁명을 촉발한 사회적 상황은 빈부격차의 더 큰 확대였다.

요컨대 그리스 본토의 고대 도시는 점점 더 많은 정치적, 경제적 기회를 부자들이 독점하는 과두제를 강화하고 있었다. 그러나 심화되는 사회적 모순과 고조된 혁명적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성공적인 혁명의 예는 거의 없었다.

  

 

 

『서양사강의』, 배영수 엮음, 한울 아카데미,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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